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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12.18 고대산 AOP 에서의 기억 1
유지보수개조2023. 12. 18.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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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이맘때쯤이면, 군대에서 추위에 떨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는 GOP 에서 생활하다가 경기도 연천에 있는 고대산 아래 부대에서 거의 2년을 보냈다. 우리 중대는 소대별로 돌아가면서 고대산 AOP 를 지키는 일을 하는 중대였다. 
 
고대산 AOP 에는 하나의 소대와, 연대 대대에서 나온 의무병, 통신병들이 근무를 하였다. 
 
소대 단위로 생활을 하게 되므로 소대내에서 취사병, 보일러병 등을 뽑아서 해당 업무를 맡게 하였다. 
 
고대산 AOP 는 여름에는 천국이지만, 겨울에는 거의 고립된 무인도 지옥에 가까워진다. 차량이 올라올 수 없는 곳이라 인력에 의해서 물건을 날라야 했는데, 모노레일이 있긴 하지만 한계가 있어서 직접 사람이 물건을 나르는 경우가 많았다. PX 는 산 아래 부대에 있어서 군것질 거리는 내려갔다 오는 사람에게 부탁해야 했다.  
 
겨울이 되면 등산로가 빙판길이 되어서 아이젠이 없이는 매우 위험한 길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 곳은 한 겨울 -28℃ 까지 떨어지는 칼바람이 부는 곳이다.
 
나는 거기서 연료관리 및 보일러, 급수설비를 유지보수하는 업무를 맡았었다. 급수펌프는 산에서 계곡이 시작되는 지점에 펌프를 설치하여 꼭대기까지 퍼올리는 방식이었는데, 농촌에서 농약살포 등에 사용되는 3.7kW 짜리 피스톤 펌프(용적형 펌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침식사 후, 산에서 펌프실로 내려와 펌프를 가동한 후, 상부 물탱크가 채워질 약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동안 라면을 끓여먹거나 음악을 듣곤 했다. 점심식사를 위해서 다시 막사로 올라가기도 하였지만, 간식거리를 챙겨와서 오후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올라가기도 했다. 

물을 올리는 낙차가 매우 컸기 때문에 급수를 마치면 퇴수밸브를 열어서 배관 속의 물을 모두 빼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배관의 약한 부분이 망가질수도 있었다. 
 


 
펌프실에는 대략 위 처럼 생긴 피스톤 펌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3개의 피스톤이 있고 6개의 체크밸브가 있다. 3개의 피스톤은 120도 각도로 되어있어 펌핑되는 유체의 맥동을 줄여주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각 피스톤이 움직일 때 일어나는 일은 아래와 같다. 


 


 

마치 주사기와 닮은 피스톤은 왕복운동을 하면서 내부 부피가 커질때는 아래 체크밸브가 열려서 물이 딸려 들어오고, 내부 부피가 작아질 때에는 위쪽 체크밸브가 열려서 토출관으로 물이 나가는 원리이다. 

여름이 되어 계곡에 물이 많아지면, 펌프의 인입구에 이물질이 딸려들어오게 된다. 지름 2mm 정도 되는 모래알 등이 체크밸브의 틈새에 걸리는 경우 체크밸브는 역방향 쪽으로의 물을 막지 못하게 되어 물이 역류하게 된다. 
 
결국 3개의 피스톤 중 1개만 문제가 생겨도 물이 거꾸로 새 버려서 펌핑이 안 되는 구조이다. 

펌프가 고장났을 경우, 1시간 30분 동안 펌프를 가동한 뒤, 올라가서 확인했을 때 물탱크에 물이 거의 없게 되어 다시 내려와서 펌프를 수리한 후 물을 퍼올려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물질이 들어와서 펌핑이 잘 안되는 경우, 네 귀퉁이의 나사를 풀어서 펌프 본체를 분해해서 체크밸브에 걸린 이물질을 빼낸 후 다시 조립하면 문제가 해결되었다. 
 
내가 속한 소대가 근무를 할 때에는 펌프가 고장나도 곧바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직접 물을 지고 나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타 소대가 근무중일때, 펌프가 고장나서 3일 정도 물을 못 올리는 일이 있었는데, 중대 행보관의 명령에 의해 펌프를 고치러 갔더니 제어판넬 내부 MC(전자접촉기) 전원선 한 가닥이 진동에 의해서 빠져 있어서 해당 전선을 다시 연결하니 펌프가 잘 동작된 적이 있다. 
 
(MC 가 붙고 떨어지는 순간에는 충격력이 가해져서 단자가 풀리는 경우가 있다.  컨트롤전원 퓨즈(다이젯휴즈)가 진동에 의해 풀리는 경우에도 펌프 기동이 안된다. )
 
특히 겨울에는 배관 전체가 얼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배관이 얼면 배관을 모두 분리하여 막사로 가져와서 녹인 후 다시 조립해야 했다. 
 
땅속에서 나온 직후의 물은 0℃ 에 가깝지 않아서 얼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여유가 있지만, 중간 물탱크에 있던 물을 퍼올리면 물이 흐르는 도중인데도 얼어버리곤 하였다. (물탱크가 영하의 온도에 노출되어 내부 물이 과냉각수가 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펌프는 용적형 펌프라, 중간에 배관이 얼어버리면 배관 중의 약한 부분이 견디지 못하고 터지거나 이음새가 빠져버렸다. 그렇게 되면 빠진 부분을 찾아서 배관을 조립한 후, 내부 물을 빼내야 했고, 입으로 불어봐서 막힌 듯 하면 중간중간을 풀어서 막힌 배관을 막사로 들고 올라와서 녹여야 했다. 
 
얼어있는 배관을 녹인 후 다시 조립할 때에는 눈이 허리높이까지 쌓여있는 산비탈에서 미끌어지는 경우도 많았고, 부품을 잃어버리는 일도 자주 있었다. 
 
특히 배관을 여러 개 조립한 상태에서 배관이 아래로 쓸려가버리면 사람의 힘으로는 끌어올리기가 힘들었다. 밖이라면 체인블럭 등을 이용하였을텐데.. 군 부대에 그런 장비가 있을 리가 없었다. 
 
여러 인원을 동원한다고 해도, 의사소통이 잘 안되고 힘조절이 어렵기 때문에 조립이 쉬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로프를 이용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배관을 끌어올리는 장치를 개발해서 한 사람은 배관을 끌어올리고, 나머지 사람은 배관을 조립하는 식으로 하여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지 않고도 배관을 조립할 수 있었다. 
 
(내가 만든 것은 화물차량 등에서 짐을 고정하는 라쳇바 와 비슷한 원리였다. 라쳇바를 직접 이용해도 가능할 것 같다. )
 



계곡에서 나온 물을 꼭대기까지 최대한 빠르게 올린 다음 배관 속의 물을 빼내는게 얼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다행히 배관 전체가 얼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근무할 때에는 상부 물탱크에 물이 얼마나 차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스티로폼에 나뭇가지를 연결해서 부표를 만들고, 수위가 올라오면 접점이 붙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어서 펌프실에는 해당 접점에 의해서 버저가 울리도록 만들었다. 
 
주변 진지작업이나, 샤워를 해야 하는 인원이 많을 때에는 늦은시간까지 펌프실에서 대기하면서 버저 계통을 확인하면서 물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통신쪽 하사관이 보더니 화재위험이 있다며 철거를 명령하여, 내가 있던 기간만 사용했다가 철거를 했다. (해당 회로는 12V 계통의 미약한 전류가 흐르는 회로였는데, 신호용 전선을 남는 220V 전원선으로 두꺼운 것을 쓰는 바람에 전선만 보고 불이 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

요즘은 버려지는 가전제품이 많으니, 가습기 수위센서 와 릴레이 등을 이용해도 동일한 기능을 구현할 수 있을 것 같다.
 


탄약고 경보기도 낙뢰가 칠 때마다 고장이 나버려서.. 리드스위치와 릴레이를 이용한 알람으로 개선했었는데.. 승인된 방식이 아니네 어쩌네 하면서 못 쓰게 하여 이 또한 철거를 했었다. 
 
 
산 아래에서 거의 3~4km 정도의 구간에 단상 2선식 220V 라인이 깔려있는데, 펌프에서 사용하는 전력이 3,750W 여서, 펌프를 가동하면 막사쪽의 전압은 180V 까지 떨어졌고, 밤이 되어 큰 부하가 사라지면 페란티 현상에 의해 240~250V 까지 전압이 상승하는 현상이 나타나서 TV 등의 가전제품이 빨리 고장나는 곳이기도 하였다.
 
전역 이후에 심심해서 한 번 방문해 봤었는데,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중간 물탱크는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아래 펌프를 고성능으로 바꿨는지 한 번에 꼭대기까지 펌핑을 하는 듯 하였다. 
 
근무하던 군인 2명에게 간식거리를 전달한 후 하산을 하였다. 
 
 
해당 부대에서 전기쪽 계통에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신병들이 설비를 다루게 될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도 고대산에서 고생을 하는 군인들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해 노하우가 조금이라도 전달되어 고생을 덜 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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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블루토파즈